인간을 겸허하게 만든다고요?(2)

지난 주 글에 쓴 내용을 좀 더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인간이 침팬지의 사촌정도 되는 것을 알 때 겸허해 진다는 말은 헛웃음이 나게 하지만 논리적으로 많은 허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이 대단한 존재 같지만 수백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침팬지 사촌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까불지 말고 겸손하라’는 이야기인데 두 분 교수님이 오히려 겸허하지 않은 것 같다는 인상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전부를 알아낸 것처럼 확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겸허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에서 생명처럼 붙들고 있는 생명나무이야기에서 더 뿌리로 내려가면 이 땅의 모든 생명은 우연이 시작입니다. 겉모습이 사람과 비슷한 영장류인 침팬지의 사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나마 양반입니다. ‘육백만년 전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오랜 시간 전에 인간의 근원이 우연히 생겨난 아주 단순한 구조를 지닌 생명체였다’는 가정은 인간을 겸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하게 만듭니다. 인격을 갖고 있는 인간은 진화론과 같은 생물학적 방법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인데, 진화론은 이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설 자리가 아예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선택’이라는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생명나무 가운데 한 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 존재에게 겸허함을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생명나무에 도덕을 걸어놓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늘날 사람들이 이토록 교만한 것이 진화론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새 번역이 나온 것을 계기로 ‘사람들이 그 교만의 길에서 겸허함으로 돌아설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착각입니다. 인간의 죄된 본성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인간의 삶에 그토록 소중한 사랑은 무엇으로 설명을 하고 이해를 하고 있는 지 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지만, 만에 하나 이런 기회가 있다면 두 분의 해박한 과학이야기로 난해한 변론으로 끝날 것이 뻔하기에 그만 두겠습니다.

진화론은 수많은 가정에 근거한 과학이라는 가면을 쓴 또 하나의 종교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과학으로 입증이 되지 않은 부분은 ‘변이‘라는 이야기로 슬쩍 포장을 하고 넘어섭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다윈을 비롯한 이 두 분이 주장하는 진화론을 과학이라는 도구로 허점을 드러내고 반박한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윈의 난해한 ‘종의 기원’이나 두 교수님이 쉽게 번역했다는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에게 다윈의 진화론보다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국민일보에 다윈의 말년을 보여준 짤막한 글이 실렸습니다. 다윈이 인생 말년을 매우 우울하게 보내면서 병실에 누워있었답니다. 호프 부인이 다윈을 방문했는데 성경을 읽고 있더랍니다. 호프부인이 무엇을 읽고 있는가를 물었더니 다윈이 답을 합니다. “바이블입니다. 아주 고귀한 생명의 책이지요.” 호프 부인이 성경을 펼쳐 보여주면서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허구를 설명을 하자 다윈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답니다. “나는 참 미숙한 젊은이였습니다.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의심을 품고 접근했습니다. 진화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화론이 ‘학문’이 아니라 창조론과 적대되는 종교처럼 신봉하게 되었지요. 제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증거 해 주십시오.”

진화론을 제대로 알 때에 인간은 겸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두 분 교수님과 그 분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다윈의 신앙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다윈의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할 겁니다. 과학자들이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은혜 없이 참된 겸허함은 말장난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진리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