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치과 예약을 한 아내를 태우고 시간에 맞춰가야 하는데 앞서 가던 차가 사거리에서 멈춰 서 있습니다. 편도 2차선인데 두 차선에 출근시간을 넘겼는데도 제법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사거리에서 사고라도 났나하고 두리번거렸는데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노인 한분이 거북이처럼 천천히 횡단보도를 걷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성미가 급한 운전자 가운데 경적을 울리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상관하지 않고 그 속도를 유지한 채 모든 차를 잠시 세워놓았습니다. 사실 경적을 울리며 어디론가 급하게 가려고 하는 그 분도 언젠가는 그 노인처럼 될 터인데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인이 속상했나 봅니다. 결국 자신에게 경적을 울린 꼴이 되었습니다. 그 노인도 왕복 4차선 도로에 놓여 있는 횡단보도쯤이야 단 몇 초 만에 건너던 시절이 있었을 겁니다. 세월의 무게가 이렇게 노인을 거북이걸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동네마다 제법 요양원이 눈에 뜁니다. 지금 추세대로 라면 향후6년 뒤인 2025년이 되면 우리나라 인구의 약1/5인 천 만 명이 65세 이상 노인이 됩니다. 이 글을 쓰는 저나 아내도 그 반열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 후 2035년이 되면 이 숫자는 수직상승하여 천 오 백만 명이 된답니다. 전체 인구의 1/4이 노인인 나라가 됩니다. 혼인율과 출산율은 점점 바닥을 치고 의료기술의 발달은 이 상승곡선을 더욱 가파르게 만들어 언젠가는 3명 가운데 한 명은 노인소리를 듣는 65세 이상이 됩니다. 아마 그 때가 되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분들 중에 절반은 이런 노인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지금도 치매 노인이 75만 명을 상회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한 노인이 백만이 넘어 설 겁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장기요양보험제도에 의하여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재정이 문제입니다. 누군가는 일을 해서 필요한 재정을 채워가야 하는데 경제활동을 하는 계층이 얇아지고 있어 필요한 재정이 제대로 채워져 갈지 의문입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자신이 살던 집에서 삶을 마감하기를 원하지만 그 원함대로 집에서 삶을 마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상당한 노인들이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요양보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습니다. 요양원에 들어와 있는 노인들 가운데 이렇게 눈을 감을 때 가족들이 함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치매로 인하여 요양원에 들어 올 때부터 이미 가족을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이런 마지막은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마지막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남겨 놓은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살던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며 눈을 감을 수 만 있다면 행복한 이사가 될 것 같습니다. 함께 성경공부모임을 하던 교수님 한분의 인척이어서 엊그제 한 국회의원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 교수님 동생의 남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서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죽음은 쓸쓸함을 넘어 비극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하게 했는지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우리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회의원이었다는 명예나 권세도 인생의 무게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의식이 점점 혼미해 지는 그 순간 그 분은 과연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았을까가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그 순간 부를 이름이 분명하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복인가를 알게 됩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도 거북이걸음을 걷게 될 겁니다. 이런 모습이 어찌 보면 슬프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부를 이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그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 국회의원의 죽음을 알리는 보도를 보면서 그가 예수의 이름을 부를 믿음이 있었을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물론 예수의 이름을 부를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도 않았을 터이지만 말입니다. 샬롬!